취업난 특집기사를 준비하면서 국내 모 대기업 관계자로부터 '취업뽀개기'(흔히 '취뽀'라는 약어로 통한다)라는 인터넷 카페를 소개받았다. 포털사이트 '다음'에 개설돼 있는 취뽀에는 취업 적령기의 회원 27만여명이 가입돼 있다. 물론 이중에는 취업에 성공해 더 이상 취뽀를 찾지 않는 사람들도 포함돼 있을 것이다.
취뽀에 마련된 여러 메뉴를 살피다보면 '스펙평가 부탁'이란 코너가 유독 눈에 들어온다. 원래 스펙(spec)이란 specification의 줄임말로 흔히 복수로 쓰이면서 '제품사양'이나 '설명서' 등을 뜻한다. 언제부터인가 취업준비생들은 출신학교와 학점, 토익점수와 자격증 소지 여부, 그리고 해외연수나 인턴 경험 유무 등을 종합해 '스펙'이란 두 글자로 줄여 부르고 있다. 대학 시절 동안 자신이 확보할 수 있는 외적 조건의 총체가 스펙인 셈이다.
이들은 스펙으로 자신을 말하고 스펙으로 평가받는다. 어차피 채용경쟁률이 극심한 시절이니 서류전형에서 지원자의 스펙을 보고 한 차례 걸러내는 것이, 비인간적인 측면이 있을지는 몰라도 일방적으로 비난할 일도 못 될 것 같다.
이 게시판에 내년 2월 졸업예정자인 한 여학생이 자신의 스펙을 평가해달라고 내놓았다. 이 학생의 스펙은 다음과 같다. 명문대 경영학과 재학 중, 학점은 4.3 만점에 3.6~3.7점. 토익점수 955점에 경제학과를 이중으로 전공했으며 1년간의 교환학생 경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올해 하반기 공채시장에서 금감원을 필두로 수출보험공사와 몇몇 대기업 전형에 연속 실패했다. 졸업을 앞두고 있는 그녀는 앞으로 인턴 경험을 쌓아야 할지, 아니면 토익점수를 좀더 끌어올려 공사시험 준비에 매진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
이 학생의 스펙은 분명 그녀가 고교시절부터 나름대로 치열하게 살아왔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녀의 실패는 누구의 작품인가. 방법론에서 조금 틀렸을지 몰라도, 혹은 채용 트렌드의 변화를 미처 읽어내지 못했을지 몰라도, 그녀에겐 죄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눈높이를 낮추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런 소리를 '조언'이라고 내뱉는 당신의 스펙은 얼마인가. 그녀만큼 열심히 살아왔나 묻고 싶다.
최성진 기자 cs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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