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스트 XP는 금융/공공 등 리거시 용도로, 비스타 게스트에는 윈도우7 이전 시절의 업무와 흔적들이 남아 있다. 원래 살던 기계는 새 OS가 차지해도 그 전날까지의 추억과 유산은 고스란히 백업되어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PC와 맥과 엑스페리아로 이들에게 언제 어디서나 원격 접속할 수 있으니 기분만은 미래다.
내가 컴퓨터와 만난 이후 거의 모든 흔적은 이 1.5 TB안에 쏙 들어갈 수 있었다. 3대의 살아 있는 컴퓨터와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지만 나를 둘러 싼 데이터가 이 하드디스크라는 불과 한뼘짜리 철물 안에 들어 있다. 이 작지만 드넓은 쇠 상자, 가격은 15만원 내외였으니 GB당 단가는 겨우 100원, DVD나 블루레이나 하드디스크나 모두 고만고만하다. 그런데 테라바이트라니,… 과거에는 NASA에서나 쓰이리라 여겨졌던 광활함의 영역을, 이제 불과 10만원으로 접근 가능해진 시대를 살아감에 뿌듯해지던 차였다.
하드디스크 크래쉬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갑자기 리부팅이 빈발하더니, 급기야 메인 파티션이 베드섹터로 꼬이면서 결국 부팅 불가. 데이터와 가상화된 이미지가 걱정이 되어 전자상가로 급히 달려가 사온 1TB로 비상 대피 하자마자 파티션 사망. 데이터를 복사하는 과정 동안 수백 건의 하드웨어 에러 메시지는 이벤트 뷰어로 쏟아지고 있었으니, 데이터가 옮겨 가는 과정을 초초하게 지켜보던 풍경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만도 같았다.
아무리 호스트 OS 이외에 추가 2대의 가상 머신이 24시간 긁어 대는 가혹 조건이라고는 하지만, 이해가 안되는 일이다. 놀랍게도 1.5 TB급 하드디스크에서는 비슷한 증상의 아우성이 넘치고 있었다. 물론 운 나쁜 극히 일부에게나 벌어진 일이겠지만 첨단 테크놀로지가 민생용으로 양산되는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전형적인 간극이 발생한 것. 시장은 초고용량급에서도 똑같은 GB당 단가를 원하기에 경쟁적으로 제품은 출하되었지만, 그 완성도나 QA는 충분치 못했던 것이고 결국은 오랜 브랜드 이미지를 망치게 되는 기업 들마저 등장하는 꼴이었다. 덧없음이란 이런 것일까? 테라바이트라는 영겁과도 같은 정보의 우주가 순식간에 흩날릴 수도 있는 일이라니.
우리는 무엇을 보관하기 위해 그렇게 대용량을 요구하고 또 공급하고 있는 것일까? 삶을 지탱하기 위한 정보의 총량도 무어의 법칙을 따르는 것일까?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싶은 것일까? 그리고 그 용량은 얼마나 될까?
생각해 보면 96년 1월부터 찍은 디카 사진은 모두 25GB가 채 안되었다. 글이나 코드는 압축하면 여전히 CD 한 장 정도다. 소중한 정보란 얼마 안되지만 돈이나 수고로 회복될 수 없는 이러한 것들이다. 이 소동 덕에 잠시 96년식 디카의 320x240 스틸컷의 추억에 빠질 수 있었음에 고마웠다. 장당 용량은 겨우 20KB.
이처럼 작지만 소중히 내가 하나하나 빚어낸 정보들은 겨우 25GB, 클라우드에도 무료 저장 가능한 용량이다. 그렇지만 클라우드도 결국은 이렇게 유약한 자기 디스크의 묶음일 뿐. 서버에 외장하드에 클라우드에 자기 디스크로 갈아타면서 보관하는 것이 유리할지, 광디스크에 넣어 두는 것이 유리할지는 아직 그 추억의 정보를 정말 고마워 할 수십년, 1백년 뒤의 순간을 겪지 않았기에 알 수 없다. 인류는 그렇게 비트를 신봉하고 있지만, 비트란 결국 크래쉬나 산화로 스러져 갈 덧없는 허상이다.
우리는 미래를 위해 백업을 한다 말하지만, 미래는 과거를 의외로 굳이 복원할 의지가 없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정말 모든 것을 다 잃더라도 이것만큼은 지키고 싶다는 소유의 욕망이 백업 미디어를 챙기게 하는 것일 뿐.
정말 잃고 싶지 않은 것이라면 가장 강력한 백업의 방법을 쓰는 것도 좋다. 그것은 역설적이지만 모두와 나누는 일이다. 인터넷에 뿌려진 정보는 지우고 싶어도 지워지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 이 불멸의 전기 신호보다 더 영원한 백업도 있다. 그것은 누군가의 마음에 남는 일이다.
비트는 스러져 사라질까 걱정되지만, 누군가의 마음에 나의 존재, 나의 창조물, 나의 아이디어가 아로새겨질 수 있다면 공기와 같이 홀가분해질 것이다. 가장 궁극의 백업을 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먼지 쌓인 백업 미디어에 무슨 정보가 있었는지 우리는 결국 기억하지 못한 채 세상을 뜰 것이다. 그렇기에 사진은 찍어 바로 나누고, 좋은 생각은 당장 나누고 행동하며, 나의 존재는 포옹으로 기억하게 할 수 있다면, 이것이 공 DVD 한 장 소유하지 않아도 더 완벽히 나를 이 지구별에 백업하는 일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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